오병수박희는 단체전인가? 개인전인가?
무예사에는 논쟁이 많지 않다. 하지만 논쟁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종종 논쟁이 있었다. 몇몇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에 논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학문권력을 행사하는 학자를 대상으로 젊은 신진학자가 문제 제기와 비판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거나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득권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인 이유로 신진학자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을 중심으로 선배 학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을 학회에 투고하면 그 논문은 선배 학자가 당연하게 전문가로서 심사를 하게 된다. 자신의 주장을 비판하고 잘못 됐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게재시키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진학자의 주장이 논문집에 실리는 순간 자신의 주장은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도 무모한 도전을 한 경우가 있다. 용기 있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게재불가를 받아 체육관련 학회지에 실리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학자를 비판하는 시도를 한 것은 학문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비판하지 않고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현존하는 학자의 주장을 비판하기 보다는 사후에 비판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 주된 이유는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논쟁 가운데 하나가 오병수박희 논쟁이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수박 관련 기사가 여덟 번 나온다. 수박이란 명칭으로 세 번 나오고, 수박희란 명칭으로 네 번 나오며, 오병수박희란 명칭으로 딱 한번 나온다. 그 외에도 맨손이나 주먹으로 사람을 죽였다거나 기둥 또는 벽을 쳤다는 기사도 몇 군데 등장한다. 수박이 특정한 맨손무술체계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맨손으로 친다는 뜻을 가진 단어인지 분명치 않으나 수박희, 오병수박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명사로 전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특정한 맨손무술체계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오병수박희라는 말이 고려사에 딱 한번 등장하는데 오병수박희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아직까지도 명확히 구명하지 못하고 있다. 고려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그것에 대하여 별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하나의 맨손무술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체육사학자들 중에도 그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이들도 있다. 오병수박희에 대한 연구는 수박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작업이며 수박에 대한 연구는 한국무예사를 정립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오병수박희 관련 전문 전체를 살펴보자.
다음날 왕이 보현원으로 가려고 오문(門) 앞까지 와서 시신들을 불러 술을 마시었는데 술자리가 한창일 때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장하구나! 여기가 바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로군!”이라고 하면서 오병수박희를 시켰다. 이것은 왕이 무관들의 불평을 짐작하고 이런 일로 후하게 상품을 주어 그들을 위무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뢰는 무관이 왕의 총애를 받을까 염려하면서 시기심을 품었다. (고려사 제128권 열전 제41 정중부조)
송형석(2005)은 앞의 인용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추론하였다. 첫째, 수박이 당시의 무인들에게 매우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수박을 잘하는 사람에게 매우 파격적인 대우로 승진 기회를 주었을 만큼 수박은 벼슬과 승진에 직결된 필수적인 무술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수박은 당시의 벼슬과 승진에 직결되었고, 많은 무인들에게 성행했던 무술인 만큼 그 기술도 매우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넷째, 수박희 경기가 벌어지고, 관람용으로 수박이 행해졌던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때 수박은 실전무술의 성격뿐만 아니라 관람용 유희의 성격도 함께 가졌다. 이와 함께 경기방식 역시 체계성을 띠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에는 수박희라는 단어는 여러 번 등장한다. 수박에 (희)자가 첨가되어 전투무예가 놀이 문화로 전환되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수박희는 맨손타격무술로 수박의 놀이 버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수박이 맨손타격무술이라는 것은 인정받고 있지만 오병수박희의 오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그래서 오병에 대한 주장이 서로 다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정찬모, 이진수, 이용복, 심승구, 남덕현 등이 있다.
우선, 처음으로 오병수박희에 대하여 연구를 시작한 학자는 정찬모이다. 그는 오병을 다섯 명의 병사로 파악하고 5대 5의 무신과 문신들 간의 단체전으로 진행했던 수박경기라고 주장하며 태권도 단체전의 효시라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문신 대 무신사이의 단체전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오병(五兵)을 한자 그대로 직역해서 5명의 병사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5명의 병사라는 말만 있을 뿐 무신과 문신간의 5대 5라는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오늘날 단체전을 연상해서 역사적 상상력에 의해서 아마도 5대 5의 수박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한 결과이다.
그 이후 이진수는 오병수박희가 수박단체전이 아니라 승발시험이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승발시험을 통해서 지위를 주었다는 예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례를 조선왕조실록 CD에서 수박희를 찾아보았다.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태종 10년 경인(1410) 1월 21일(무자) 수박희로 시험하여 방패군을 보충하다 병조(兵曹)와 의흥부(義興府)에서 수박희로 사람을 시험하여 방패군(防牌軍)을 보충하였는데, 세 사람을 이긴 자로 방패군에 보충하였다.
이 같은 사례를 근거로 고려시대의 수박희의 성격을 추론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박을 잘하여 선발되어 벼슬을 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의민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그는 5병을 1대 5의 승발경기라고 주장하였다. 1명이 1대 1의 경기에서 승리하면 승자가 또 다른 1명과 싸우고 여기서 승리하면 계속할 수 있는 경기방식으로 현재 택견에서 채택하고 있는 경기방식이다. 그의 주장을 상세하게 알아보자.
1) 오병수박희는 문신과 무신이 편을 갈라 실시한 수박의 단체전이 아니다. 2) 오병은 5가지의 병기를 말하며 당시의 무인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5명의 수박선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3) 고려의 수박은 군인들이 장교로 승진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무술이었지만 구경거리로 전락하여 천기로 불리어져,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승발경기는 조선시대 초기까지 이어져서 무예에 뛰어난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다는 사료가 남아있다. 이 근거를 통해서 고려시대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을 한 것이다. 모든 것은 갑자기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천천히 변화를 하는 것이 문화의 속성이다. 여말선조의 왕조교체기에 사라져 버린 수박이라는 용어는 이후에는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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