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스프린터들은 골인 뒤 신발을 벗어 카메라에 비출까 ?

독일의 하리는 1960년  6월 2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상 처음으로 100m 를 10플랫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백인으로서는 마지막 100 세계신기록 수립이었다.  그 이후로는 흑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당시 하리가 신은 신발이 단연 화제였다.  1948년 창립한 아디다스가 핀이 4개 달린 가볍고 튼튼한 맞춤 신발을 제공한 것이다.

요즘이야 맞춤 신발이 일반화 됐지만 당시만해도 특정 선수를 위한 맞춤 신발은 처음 이었다.  그만큼 하리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아디다스는 하리에게 맞춤 신발만 줬지 그 이상의 아무 대가를 주지 않았다.  하리는 화가 났다.  그래서1960년 로마 올림픽 때는 아디다스의 라이벌인 푸마 신발을 신고 달려 우승했다.

하지만 하리는 너무 나갔다.  시상식 때는 엉뚱하게도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나갔던 것이다.  아디다스와 푸마 두 회사에서 모두 돈을 받기 위해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여론이 빗발치는 것은 당연했다.  ‘돈독 오른 하리’라며 곤죽이 되도록 얻어 맞았다. 결국 하리는 돈도 못 받고 욕만 잔뜩 먹었다.

아베베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맨발로 달려서 우승했다.  하지만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는 맨발로 달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세계적인 신발회사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로마 올림픽에서 어처구니없게 아베베를 놓쳐버린 아디다스가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베베를 잡는데 성공한 것은 아디다스의 라이벌 독일의 푸마였다.  아디다스는 뼈아팠을 것이다.  두 회사는 그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두 회사의 창업주가 피를 나눈 형제였지만 사업에는  ‘피도 눈물도 ‘ 없었다.

칼 루이스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무게 120g밖에 나가지 않는 나이키 신발을 신었다.  신발은 발 길이와 같은 것을 썼다. 코너링 때 미끄러짐을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 였다.

칼 루이스는 이 대회에서 단거리 4관왕에 올랐다.

나이키가 제작한 마이클 존스의 ‘황금신발’도 유명하다.

나이키는 마이클 존스의 발 끄는 습관을 알아냈다. 코너링 때 양발의 움직임도 각기 달랐다. 결국 양쪽 신발의 밑창 플레이트를 비대칭 형태로 제작했다.  무게를 112g으로 더 줄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아예 순금으로 진짜 황금 섬유 신발을 제작했다. 공기 저항을 최대한 줄여 200m에서 11 cm 즉 100분의 1초를 단축하는 효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스프린터들은 신발을 벗어들어 V자를 만들거나 두 손으로 끌어 안는등 여러 가지 제스쳐를 취한다. 자신의 신발 후원사를 위한 계산된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스포츠화 싸움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대회는 수없이 이어지고 육상에는 47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지금까지 단거리는 나이키가 우세하고 장거리에서는 아식스가 앞서왔다.

푸마나 리복은 그 틈새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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