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는 언제 시작됐나?
최초의 운동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초등학교 시절을 추억하면 떠오르는 것이 운동회다. 당시 운동회는 봄과 가을에 주로 하였다. 특히 가을 운동회는 추수를 하고 동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가하는 잔치이며 지역축제였다. 축제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유년의 기억은 아름답기만 하다.
운동장 하늘에는 만국기가 펄럭였다. 만국기만 봐도 운동회가 시작 되었다는 들뜬 마음이 있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매스게임이 이어지고 장애물 달리기, 모래주머니 던지기 게임, 공굴리기 등 단골 프로그램이 꼭 운동회에 들어가 있었다. 저학년은 모래주머니를 던져서 상대팀보다 먼저 박을 터트리는 게임이었다. 무엇이 신이 나는지 그렇게 하루 종일 운동회는 진행되고 어머니가 싸오신 점심을 이웃과 함께 둥그렇게 앉아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살기가 비슷한 이웃들이기에 특별한 음식은 없었다. 김밥이 대표적인 메뉴였다.
이 땅에 운동회가 도입된 것은 일본의 의해서이다. 일본은 일본 본토에서 행하던 근대교육의 산물로 운동회를 이 땅에 들여왔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운동회를 했는가에 대한 이견이 좁히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논쟁 주제가 운동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최초의 기원에 관한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핵심은 운동회의 특성을 규정하는 것이며 어떤 것을 운동회라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다.
구한말 운동회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구한말의 관보, 실록, 일기, 신문, 잡지, 보고서, 규정집 등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개최현황, 개최장소, 개최주최, 개최시간에 맞추어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이 시기의 운동회는 406회 개최되었으며, 한성과 인천이 포함된 경기도에서 가장 활발하였다. 개최 월은 4월~6월에 집중적으로 실시되었으며, 10월과 11월에도 많은 전개가 있었다. 개최 장소는 한성의 훈련원, 삼선평, 장충단을 중심으로 전국각지의 강변, 궁궐, 무덤, 섬, 절터, 정자, 평야, 항구, 학교 등지에서 펼쳐졌다. 개최주최는 학교가 축이 되었으며, 다음이 연합, 사회, 개인주최였다. 개최시간은 8시 9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10시, 13시, 7시, 11시 등의 순서를 보였다.
지금까지 한국체육사의 대부분이 나현성의 초기연구(박사학위논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된 이유는 그의 연구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검토하지 않았고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료 수집과 검증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연구하려는 안일한 마음이 사료 수집과 검증이라는 과정을 생략하고 가져다 쓰는 인용을 통해서 서술해 왔다.
최초의 운동회는 나현성의 주장에 따라서 화륜회를 운동회의 효시로 인정하였다. 최근에 신진학자들이 등장하여 운동회에 관한 사료검증을 통해서 운동회의 효시를 수정할 것을 문제 제기 하였다. 여기서 운동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중요하다. 운동회의 특성으로 다른 것과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 운동회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시간만을 소모하는 것이 되기 쉽다.
구한말 화류는 화류를 포함하여 화류회, 화류연, 화류관람회의 용어로 범주화되어 나타났고, 이는 춘계운동회, 연회, 꽃놀이 소풍, 외설적 연회, 사전적 의미의 꽃과 버들, 꽃구경의 성격을 보였다. 또한 꽃놀이 소풍은 운동회로 비춰지고 인식되는 경향을 보여, 선행학자들의 주장과 상이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아울러 소풍과 야회는 명칭이 지니고 있는 제 의미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운동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소풍놀이와 같은 형식을 갖춘 화륜회를 운동회로 보는 것처럼, 근대화된 모습의 운동회를 찾을 수 있다. 과거의 신문이나 각 초등학교의 역사서를 검증하여 최초의 운동회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 운동회는 시기도 중요하지만 먼저 일본에 의해서 조선에 수입된 소풍, 운동회, 조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운동회에 관한 박사학위논문 2편이 발표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회에 대하여는 다소 이설이 있다. 나현성(1981)은 한국최초의 근대식 운동회는 1896년 5월 2일 동소문 밖 삼선에 소풍가서 영국인 교사 허치슨 지도하에 베풀어진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이태웅(2005)은 1896년 4월 25일 배재학당 화류회가 1896년 5월 2일 영어학교 화류회보다 먼저 시행되었으며 그 당시 화류회를 운동회로 간주한다면 배재학당의 화류가 최초의 운동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김재일, 2008).
운동회가 근대교육사 혹은 근대체육사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운동회는 단순한 운동경기라고 보기보다는 사회체육의 효시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당시의 운동회는 동네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지역축제 뿐만 아니라 계몽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당시는 결사 집회의 자유가 발탈 당했던 시기였다. 공식적으로 대규모의 지역주민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운동회뿐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회는 근대 유물을 수용하고, 근대교육을 진행했던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운동회와 일제식민지 시기의 운동회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당시 운동회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빈들에게 찬조금을 걷어서 재정을 충당하였다.
운동회는 일본에 의해서 조선에 도입된 교육제도이다. 조회, 소풍, 신체검사, 운동장 등 근대체육에 관련된 몇 가지 것들은 일본에 의해서 실시된 것임에는 틀림이없다. 운동회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나를 확인하는 작업은 많은 사료를 검증해야 한다. 그것은 최초의 운동회라고 알고 있었던 화류회가 최초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다. 최초의 운동회를 말하기에 앞서 운동회의 대한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성격규정이 끝난 이후에 운동회가 언제 시작되었나를 확인할 수 있다. 운동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운동회의 성격과 일치하는 행사를 찾으면 그것이 운동회의 효시가 된다.
운동회의 효시도 중요하지만 운동회의 목적, 운동회의 성격, 내용, 방법 등 교육적 측면과 축제적 측면 등 다양한 각도에서 운동회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당시 운동회는 조선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는 운동회를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통해서 운동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스포츠 중계 손오공 티비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