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수박희는 단체전인가? 개인전인가?
수박은 사라지고 권법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수박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몸으로 배운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속성이 있다. 몸으로 배운 몸짓은 지속적으로 몸의 기억을 통해서 전해진다. 수박과 권법이 완전히 다른 무예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왜냐하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무예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무예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무예의 변용이란 과정이 필요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박과 관련된 기사가 모두 17차례나 보인다. 기사들을 분석해 보면 방패군이나 갑사와 같은 무사 선발 시험으로 활용되었다. 무사선발에서는 수박희를 개최해 세 사람을 이긴 사람을 방패군으로 보충하거나, 네 사람을 이기면 상둥, 세 사람을 이기면 중등으로 등급을 매겼다. 또한 수박을 잘하면 양천을 논하지 말고 관에서 양식을 주어서 불러들이라고도 하여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수박이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수박은 조선 전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서 실시되었으며, 관에서는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 방법으로, 또 특별한 행사의 관람용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수박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고, 권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학자는 남덕현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선행 연구 검토를 통해 수박의 특성은 단순히 타격형식으로 볼 수 없으며, 손과 발로 하는 모든 형식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한국 전통 수박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고려시대를 통해 본 수박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 전기 경우 무인을 추천에 의해 선발하는 군반씨의 음서제도, 장병식 원거리 전투방식, 무인 홀대 정책 등에도 수박에 관련된 내용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과 교류를 통해 ‘병수(兵)’와 같은 격투무예의 수입 사례는 당시 고려전기 수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둘째, 무인정권기에서 수박의 특성을 살펴보면 수박이 복합적 형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쿠데타를 주도한 고위무인 및 최씨 정권에서의 하급무인에 이르기까지 전공사례들을 살핀다면, 단순 타격의미로써의 수박과 동시에 유술계성 기술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수박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고려 중기 의종조 오병수박희를 살펴볼 때, 수박이 실전에 활용된 복합적 방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관련된 논쟁들에서 오병의 의미부여 및 수박의 행위방식과 관련한 논란에 대한 분석을 실시한 결과, 오병에 대한 다른 견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경기진행 방식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실전에 활용될 수 있는 기술로써 다양한 경기 방식의 수박기술을 엿볼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남덕현은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업에 참여하여 고려시대 전문연구가로부터 고려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배우고 자문을 얻어서 앞의 내용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는 5병을 오군영을 대표하는 병사라는 주장과 또는 다섯 가지 병장기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오병을 병장기로 보는 입장은 이진수의 주장과 일치한다. 병을 병장기라고 보는 근거는 중국에서 병을 병장기로 명명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분명히 5병의 병은 병장기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수박이 전투를 위한 훈련이라 생각한다면, 맨손으로 만의 대결이 가능할 수 없고 병기와 병기의 대결, 비무장 상태에서 병기를 가지고 있는 상대와 대결, 맨손과 맨손의 대결, 즉 서로 비무장 상태의 광의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택견전문가 이용복은 오병을 ‘다섯 명의 병사’로 보고 오병수박희를 다섯 명의 병사가 서로 어울려 수행한 수박훈련방식이라고 하였다. 심승구는 오병은 고려의 중앙군인 중군, 전군, 후군, 좌군, 우군의 오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오병수박희를 의종의 호종군사 가운데 오군 소속의 군사와 이들을 거느린 무신들을 대상으로 행한 병법훈련의 일환으로 보았다. 경기방식은 1대 1의 자유겨루기로 이루어졌으며, 한 사람이 상대방을 이기면 다른 사람과 계속 겨루는 승발시험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까지가 오병수박희 논쟁의 핵심사항이다.
지금까지 오병수박희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과 주장을 들을 수 있었다. 오병수박희는 고유명사인가? 일반명사인가? 아니면 오병은 형용사로 수박희를 수식하는 것에 불과한지 알아보아야 한다. 보통명사로 오병수박희를 인정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나. 과연 오병수박희는 어떤 경기였을까? 궁금하다면 도서관에서 고려사를 찾아서 한번 읽어보고 지금까지 나온 해석들을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명확한 자신의 입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이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오병수박희는 오병이 하는 수박희로 승발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병수박희, 삼병수박희, 이병수박희라는 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이와 같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오병으로 하여금 수박희를 하게 한 것이라는 문장에서 사관이 시킬 사(使)를 사용하지 않은 경우는 아닌지. 사(使)자가 있다면 분명하게 해석이 가능하다. 사관이 빠트리고 사용한 것은 아닌지. 혹은 오병이 다섯 가지 병장기를 지칭한다면 병장기를 가지고 수박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병은 병장기를 사용하는 장수들의 대표선수를 지칭하고 이들을 하여금 수박희를 하게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을 다루는 병사들, 칼을 다루는 병사들과 같이 병과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상상력의 꼬리는 꼬리를 문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