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인가? 스포츠문화사인가?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체육 혹은 스포츠의 역사에 관한 과목명과 명칭이 체육사가 맞는지 혹은 스포츠문화사가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어떤 대학에서는 체육사, 또 다른 대학에서는 스포츠문화사라는 명칭으로 가르치고 있다. 강좌 명에 따른 내용을 살펴보면 유사함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는 교재와 강의내용이 같은데 한 곳에서는 체육사고 다른 곳에서는 스포츠문화사라고 한다. 올바른 명칭사용이 필요하다. 형식(이름)과 내용이 일치하여야 오해를 막을 수 있다.
왜 이렇게 명칭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강좌의 필요성에 찾을 수 있고, 다른 이유는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강좌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이 좀 더 거부하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과명이 필요해서이다. 그만큼 학생들이 체육사 과목에 대하여 지루하거나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지루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과목 명칭은 체육사보다 스포츠문화사가 그럴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보다는 우리사회의 변화에 따른 명칭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이러한 문제는 체육이나 스포츠냐 하는 오랜 개념논쟁에서 시작되었다. 체육과 스포츠가 분명 다른데 혼용해서 사용한다. 어느 상황에서는 체육이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스포츠이다. 대한체육회의 명칭을 봐도 그렇다. 영어로는 스포츠라고 표기하고, 우리말로 말할 때는 체육이라고 한다. 우선 전국체육대회 명칭부터 문제가 있다. 체육은 교육이다. 그런데 교육을 시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 전국운동경기대회가 맞는 명칭이다. 처음부터 잘못 사용해서 지금 와서 개명하기가 쉽지 않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이유가 다 있다.
명칭과 내용은 되도록 일치해야 한다. 한식당에 들어갔는데 한식은 없고 중국음식만 있다면 우리는 나와서 한식당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냥 고픈 배를 채우며 된다는 생각이 크다.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냉면을 국수라고 우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냉면과 국수를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국수를 냉면이라고 우겨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일단 체육사라는 것은 ‘계획적인 신체활동을 통한 교육의 역사이다’고 하는 체육의 역사를 연구하고 배우는 과목이다. 주로 체육교육과에서 배울 수 있는 교과목이며 각 시대별 체육교육의 변천과정을 배운다. 예를 들어 로마와 그리스의 체육을 배운다면 그 당시의 체육교육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다. 이상적 인간상, 목적과 목표, 내용과 방법, 평가 등에 대하여 배우면 된다.
반면에 스포츠문화사는 문화로서의 스포츠에 관한 역사를 배우는 과목이다. 교육으로서의 스포츠가 아니라 문화로서의 스포츠 즉 스포츠문화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시대별 특징과 관련하여 배운다. 이처럼 분명히 명칭에 따른 내용이 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유사한 것은 명확한 구분을 통해서 수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하고 체육사가 지루하지 않다는 이미지와 인식을 전환하기 위해 명칭을 변경해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내용과 이름이 일치하도록 교과내용을 편성해서 교육해야 한다. 이름과 내용이 다르게 가르쳐서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킨다. 눈앞의 이익만을 위하다가 거시적 관점에서의 요점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바로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배워서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칭에 대한 올바른 정립을 통해서 진정성을 갖고 올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체육과 스포츠는 같은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같이 혼용해서 사용한다. ‘체육은 교육이고, 스포츠는 문화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교육과 연구를 한다면 문제가 없다. 이런 구분조차도 없이 사용하다 보니까 혼란이 생긴다. 교수도 명확하지 이해하지 않고 학생을 가르치면, 학생도 혼란스러운 뿐이다. 교육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일이다.
체육사는 교육의 관점에서 강의를 계획하고 그것에 맞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핵심은 교육이다. 그 당시의 시대에는 어떤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어떠한 내용으로 체육을 가르쳤나에 대한 것을 배움으로써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체육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현재를 더 잘살기 위함이다. 그냥 과거의 무슨 일이 있었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현재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순환론적 입장에서 보면 같은 일들이 무수히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스포츠문화사는 일단 문화로서의 스포츠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스포츠문화가 각 시대에 어떻게 변해왔나를 배우는 것이다. 교육적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 차원에서 스포츠의 변화에 대하여 배우면 되는 것이다. 각 시대의 변화 속에서 스포츠문화는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해왔는가에 대하여 배우면 된다.
구별을 통해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다. 이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맞는 내용을 함께 바꾸어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다. 이름과 내용이 일치하여 이름에 걸 맞는 내용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출판된 서적들이 일관된 제목을 사용하지 못하고자의적으로 제목을 정하다가 보는 혼란스러운 형국이다. 정체성은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서명을 정하면 된다. 책 내용과 관련 없는 서명을 정하다 보니 혼란을 자초하고 있다. 교육적 관점에서 서술된 체육사책이 없고, 문화적 관점에서 서술된 스포츠문화사책이 없기 때문이다. 국내외 책을 발췌하여 짜깁어놓았기에 일관된 내용과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일단 체육사 책인지 스포츠문화사 책인지 성격 규명을 명확하게 하고 정체성을 갖고 책이 서술되어야 한다. 그냥 유사한 내용만 채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일관된 사관을 가지고 일관성 있는 집필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혼돈을 줄이고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사료를 수집하는 것이다. 수집된 사료를 어떤 사관에 의해서 서술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이는 체육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포츠문화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자를 포함하는 ‘신체활동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신체활동의 역사라고 규정하면 체육사도 스포츠문화사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교육목적을 위하여 행한 신체활동의 역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분야는 체육사가 되고, 문화를 위한 신체활동의 역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분야는 스포츠문화사가 된다. 신체활동의 역사라고 하면 그 규모가 너무 크다는 점이 한계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명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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